[카미코토] 태연 사계_서담님
00. 언제야, 봄이던가.
“저기 말야, 당신.”
봄바람은 불어온다. 어째서 이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고교에 진학한 지 이유를 모를 레벨 5의 소녀는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며 웃었다. 어울리지 않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며.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조금 큰 카디건의 끝으로 살짝 나온 얄상한 손가락이 레벨 0의 소년에게로 뻗어지고, 소녀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옷자락을 살짝 잡는다. 봄바람이 불어왔다. 흐드러진 벚꽃잎이 바람결을 타고 한순간 허공을 수놓는다. 소년은 홀린 듯이 멍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본다. 2년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갈색 단발머리 위로 연분홍색 꽃잎이 몇 개 흘러내리다가 걸쳐진다.
소년은 손을 들어 소녀의 머리카락에 얽힌 벚꽃잎을 살짝 잡았다.
“나를 받아주지 않을래?”
“…….”
되묻는 말은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결연한 표정, 벚꽃잎처럼 연분홍색으로 발갛게 물든 얼굴.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웃음을 그리고 있다. 소년은 잡았던 꽃잎을 머리칼에서 떼어내 허공에 놓았다. 한들한들 흔들거리며 꽃잎은 떨어진다.
긴장감에 속이 떨려 울상을 지을 법도 한데 기어코 웃고야 마는 소녀를 보며, 소년은 말한다.
01. 내 겨울을 주고, 또 여름도 주었던.
여름은 새파란 색이었다. 프리즘을 통과한 햇빛처럼, 사방으로 깨어져 나간 거울 조각처럼, 썬 캐처처럼 반짝이는 계절이었다. 여름은 네가 나를 받아들였던 봄의 끄트머리와 함께 머리를 들이밀며 웃는다. “응, 기꺼이” 흐드러진 벚꽃 나무 아래서 그렇게 답했던 네가 어쩐지 훌쩍 커버린 것처럼 느껴지던 계절이었다.
그리고 여름의 너는 새붉은 색이었다. 맞닿은 손은 조금 끈적하고, 뜨거웠다. 주룩주룩 새어나간 땀처럼, 설렘도 애정도 몽글몽글 새어나간다. 뙤약볕 아래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계절에 우리는 종종 손깍지를 끼고서 부끄러운 마음에 말없이 한참을 돌아다니곤 했다.
열기 때문인지 혹은 쑥스러움 때문인지, 너는 항상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채였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그러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너는 서글서글한 눈매를 어색하게 휘며 웃었다. 그 웃음조차도 간질간질하니 기분이 좋아서, 나도 그 웃음을 얼굴 위로 따라 그리며 웃었다.
그 여름의 우리는 그랬다.
너와의 두 번째 여름. 네가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네 번째의 여름의 끝에 서서 나는 비로소 네 손을 놓았다. 끈적끈적한 땀과, 그 속에 배어 나온 설렘과 애정이 맞닿았던 손바닥 사이로 기다란 실처럼 늘어진다. 찐득거리는 물풀처럼.
나는 그 물풀 탓에 너의 손을 완전히 놓지 못했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네 번째의 여름의 끄트머리에서 네 손을 놓을 준비를 했던 거였다.
“춥지 않아?”
“응, 괜찮아. ……손 시리면, 잡아도 돼.”
“아하하, 그렇네.”
하필 오른손. ‘능력으로 따뜻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늘 이러고야 말아. ……이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동안의 겨울은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의 겨울은 유난히 뾰족한 세모난 모양을 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지난여름에 놓으려 했던, 놓을 준비를 했던 손에 깍지를 낀 채로 멀거니 너를 올려다봤다.
겨울을 닮았다던 나와는 다르게, 여름을 닮은 너는 흰색이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어울리지 않는 흰색에 둘러싸인 채로 너는 나를 내려다본다.
“미사카.”
4번의 여름, 네 번의 겨울이 돌아올 때까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호칭을, 너는 입에 담아낸다.
“응.”
그렇게 대답한 순간, 나는 비로소 그 이름의 울림을 스스로 지웠다.
“좋아해.”
너는 깍지를 낀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 뺨에 가져다 댄다. 꽁꽁 얼어있는 뺨에 뜨끈한 손등이 닿고, 퍼뜩 놀라는 나를 보며 너는 웃는다. 즐거운 듯이 또래의 고등학생처럼 킬킬 웃음을 내뱉다가, 이어서 다시금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버린다. 두 손이 전부 들어가기는 조금 버거운 모양인지, 주머니는 낑낑거리며 두 손을 겨우 삼켜냈다.
내 대답은 상관없는 모양인지 너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말이 성큼성큼 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내 보폭을 배려해준 모양새였지만. 보폭은 큰 주제에 슬로우 모션처럼 너는 느릿느릿 걷는다. 그 모양새가 익숙하고도 무언가 우스워서 나는 고개를 숙여 자그맣게 웃었다. 들썩이는 내 어깨를 너는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앞을 바라본다.
“나, 나도.”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라서, 2년이 지난 지금조차도 나는 혀에 마비가 일어난 사람처럼 어정쩡하게 답하고 만다. 너는 의외의 것을 들은 사람처럼 나를 바라본다. 찬 겨울바람에 새카만 뾰족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내 머리칼도 함께 세차게 흔들렸다.
너는 바람을 막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내 앞을 가로막는다. 내 손은 여전히 네 손에 붙잡혀 코트 주머니에 껴있는 채였다. 너는 천천히 정리하고 있는 나를 전부 알고 있는 사람처럼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바람 빠진 웃음을 짓는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게 속삭인다.
전부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다정하게도 너는.
02. 온 세상이던 널 보낼래.
“널 종교로 삼고 싶어. 네 눈빛이 교리가 되고 입맞춤이 세례가 될 순 없을까.” 언젠가 뒤적거리며 읽었던 이웃 나라의 시를 떠올렸다. 이현호의 ‘붙박이창’ 특이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던 시의 내용은 조금도 특이하지 않았다. 같은 문화와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 두 개의 문장이 마음을 둔하게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를 바라본다. 네가 언젠가의 어렸던 나를 혈액으로 얼룩졌던 그 날로부터 구원한 순간부터, 너는 오롯하게 내 세계를 이루는 기반이었다. 내 세계는 너로 이루어져 있고, 나는 너로 물들어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랬다. 너는 내 온 세상이었다.
그러니 너는 종교였다. 나는 너의 신자였고, 기어코 신의 곁을 차지하고야 말아버린 무지몽매한 인간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넘봐서는 안 될 선악과를 탐내고도 신의 옆자리까지 탐해버린 죄려나. 천벌이라도 떨어져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체념하고서 편해지고 싶은 마음에 내뱉었던 고백에 보답을 받았을 적에는, 아무런 나쁜 일도 생기지 않아 덜덜 떨기도 했으니.
“그야,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잖아.”
세 번째의 가을, 나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귓등으로 넘기며 말한다. 너는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사람처럼 당혹스러운 얼굴로 발걸음을 멈춘다. 길거리에 우뚝 선다. 나는 모르는 척 계속해서 발걸음을 느리게 옮겼다. 딱히 네 표정을 보고 싶지가 않아서. 확인 사살이라도 당할까 봐.
네 눈빛은 교리였다. 더 나아가자면, 너의 행동과 말마저도 내게는 성경과도 같았다. 예수의 열두 명의 제자가 예수를 사랑했듯이, 나는 너를 사랑했다. 그것은 존경이자 동경이었고, 한없이 아가페적인 사랑임과 동시에 에로스적인 사랑이었다. 그리고 매니아적인 사랑도 한 스푼 정도 섞여 있으려나.
“무슨 소리야.”
“…….”
목소리의 끝이 조금 떨린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둔탁하게 귓등을 두드리고, 너는 그 와중에도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는다. 사람을 구했다는 증거라며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던 흉터들로 가득한 너의 오른손은 내 왼손을 잡는다. 투박한 손은 익숙하게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낀다.
나는 흘끗 시선을 내려 얽혀들어 간 두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눈동자는 가을 햇볕에 비쳐 짙푸른 색을 드러낸다. 너는 당황스러운 모양인지 푸른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려 연신 내 표정을 살핀다. 나는 그것이 조금 낯뜨거워서, 고개를 돌렸다. 너는 참 다급히도 말한다.
“내가 왜 너를 안 좋아해.”
“…….”
“그럼 내가 왜 너와 사귄다고 생각한 거야.”
나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답답하다는 듯이 조금 더 강하게 손을 잡은 너는, 한숨을 푹 내쉰다. 반사적으로 떨린 어깨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는 애써 웃으며 깍지낀 손을 쥐락펴락 주물거리며 말한다.
“좋아해.”
“…….”
“좋아하니까.”
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 그 모든 것들은 성경을 닮았다. 실로 성스럽다든가,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다만 내게 있어서 삶의 지침이 되는 것들이었다. 성경에 적혀있는 구절들을 달달 외우며 따르는 기독교의 신자처럼, 나 또한 그랬다.
‘카미조 토우마’ 집필자가 너의 이름으로 메워져 있는 성경을 끌어안고서, 나는 너를 외웠다. 너로 이루어진 내 세계를 배웠다. 내 겨울과 여름, 봄과 가을을 기꺼이 내어주었던 너를 이해하고자 했다. 결국 인간은 신을 이해할 수가 없는 법인데도, 내 신인 너는 결국엔 인간이라서.
첫째. 사랑할 것
둘째. 사랑을 의심하지 말 것.
셋째. 바뀌지 않을 것.
교리가 법률이라면, 너와 했던 세 가지의 약속은 헌법이었다. 교리의 모든 것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한 밑바탕이었다. 카미조 토우마를 사랑할 것. 카미조 토우마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 것. 너는 세 번째 약속이 감정이 변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글쎄.
“저기, 있잖아.”
“응?”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는 나뭇잎 위로 새하얀 눈을 잔뜩 쌓아둔 채로 흔들거린다. 위태롭게. 금방이라도 그 밑을 지나가는 너의 머리 위로 쏟아질 것처럼. 나는 잽싸게 너의 손을 잡아챘다. 눈더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네가 서 있던 그곳으로 와르르 떨어진다. 나는 우물우물 말을 흐리다가, 이내 입을 열어 물었다.
“곧 졸업이지?”
“그렇지.”
“한 번 더 유급할 줄 알았더니, 결국엔 너도 졸업이라는 걸 하는구나.”
겍, 그런 소리를 내며 너는 인상을 찌푸린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고, 내 손을 끌어당긴다. 몸은 반항 없이 가볍게 이끌려 폭신한 겨울 교복에 부딪힌다. 너는 나를 품 안에 끌어안고서 머리칼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이대로 전격을 한 번 쏘아버릴까. 그런 짓궂은 생각은 고이 접어 넣고서, 가만히 입을 네 어깨에 묻으며 눈을 깜빡였다.
“학교에서 미사카 씨를 보는 것도 곧 마지막이야~. 카미조 씨, 슬퍼서 어떡해.”
“웃, 웃기지 마.”
“……너 정말 시간이 지나도 적응 못 하는구나.”
“시끄러.”
반사적으로 파지직 튄 전격을 익숙하게 오른손으로 없앤 너는 푸스스 웃는다.
너는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를 사랑했다. 정확히는 그런 거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만. 나는 4번의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은 기장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번째의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나는 굳게 잡으려 했던 너의 손을 놓을 준비도 함께 했다. 내가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했고, 애정했으며, 귀애했으니까. 다만 내가 너를 놓는 이유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너도 나를 봐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졸업 기념으로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
“무엇이든 주는 거야?”
“으음, 뭐, 그렇지.”
나는 읊조리듯 답한다. 처음으로 선물을 받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들뜬 얼굴로 너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다가, 이내 빙긋이 웃는다.
“됐어.”
“……왜?”
내가 너의 손을 놓으려 하는 이유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늘 내게 사랑을 속살거리던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기대치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내 사랑보다 적은 감정이라는 의미도 아니었다.
다만 너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버릇이 있어서, 그 버릇 탓에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라서.
“그냥, 됐어. 어차피 미사카가 내 옆에 있어 줄 거잖아.”
너는 변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너는 자라지 않는 내 단발머리를 사랑했고, 나이를 먹지 않는 나를 사랑한 거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한결같이 너를 내 종교로 받들고 있었기에. 이것이 변하지 않은 감정이라서 너는 나를 애정했던 거였다.
“…….”
“미사카?”
“…아니야. 그보다 졸업 선물, 꼭 생각해둬.”
나는 너에게 넌지시 말한다. 나는 너를 만난 그날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긴 탓에 멈춰뒀던 내 시간을 지금이라도 돌릴 것이라고. 멈춰뒀던 몸의 시계에 다시금 건전지를 집어넣고, 시침과 분침이 잘 보이도록 닦아둘 거라고. 자라지 않는 내 마음에 물을 주고, 비료를 담뿍 뿌려줄 것이라고. 나는 더 이상 멈추지 않고, 자라나고 변할 거라고.
나는 넌지시 너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만난 이후의 네 번째 봄에 너를 떠나보낼 거라고. 그래서 더는 너의 곁에 있지 않을 거라서, 너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주고 싶다고.
너는 모든 것을 눈치챈 사람처럼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버거운 것처럼, 힘겨운 것처럼. 너는 대답한다.
“응.”
시작했을 적과 똑같이, 짧게.
03. 그 긴 낮과 밤들이
분홍 장미, 분홍 안개꽃, 흰꽃나도사프란, 허브 세이지……. 공통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꽃들은 제각각 보란 듯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나는 그 꽃 더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시는 너를 보다가, 문득 창피해져서 고개를 푹 수그렸다. 꽃다발에서는 장미 향과 허브향이 짙게 풍긴다.
분홍색, 군데군데 섞여들어 간 흰색의 크고 작은 꽃들. 그리고 가장자리를 듬성듬성 장식하고 있는 푸른색의 꽃. 나는 너에게 받은 행복과 사랑을, 애정과 즐거움을, 기쁨을, 그리고 구원을 꽃다발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토키와다이의 꽃꽂이 수업의 과제였더라면, 분명 불호령을 받을만한 꽃다발을 만들어버린 거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미사카, 선물이 너무 많지 않아…?”
너는 졸업장이 들어있을 원통과 함께 꽃다발을 품에 끌어안은 채로 묻는다. 나는 아까 전, 우르르 몰려온 너의 친구들이 시시덕거리며 찍어준 폴라로이드 사진을 너에게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졸업이잖아. 그 정도는 받아둬.”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닌데.”
졸업식 내내 입고 있던 교복은 가장 첫 번째로 들렸던 점원에게 버려달라고 한지 오래라, 그 대신 제법 유명한 브랜드의 옷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채로 너는 발갛게 얼굴을 붉히고 있다. 툴툴거리긴 해도, 졸업 기념으로 받은 것이라 기쁘긴 한 모양인지 색 조합이 엉망인 꽃다발에 코를 묻고 있다.
“정말 그 정도로 괜찮아? 더 좋은 걸 사주고 싶었는데.”
“엑? 아냐, 이것도 충분히 비싸잖아.”
기겁하는 표정을 지으며 너는 내게서 조금 멀어진다. 맹수를 앞에 둔 초식 동물 마냥 다소곳하게 다리까지 모은 너는 입술을 댓발 내놓은 채로 투덜거린다.
“너무 받기만 하는 것도 불편하다고.”
그런가. 짧게 중얼거리는 나를 흘끗 훔쳐본 네가 잠시 꽃다발과 원통을 벤치의 옆자리에 내려놓고는 외투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안에 넣은 거라고는 휴대폰 밖에 없으면서, 한참을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내 표정을 살피던 네가 다른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서글서글한 눈매는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그 안으로는 반짝거리는 감정밖에 보이지가 않아서, 나는 슬쩍 시선을 내려 네 시선을 피했다. 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내 손을 끌어당겨 그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는다.
“나만 받기는 뭐하니까.”
“…….”
“아, 딱히 내년 졸업 선물을 이걸로 퉁친다는 말은 아니니까! 제대로 축하해줄 테니까.”
너는 허둥지둥 뒷말을 덧붙이며 어색하게 웃는다. 나는 물끄러미 어설프게 웃고 있는 네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손 위에 올려진 목걸이를 봤다. 펜던트는 안에 사진을 넣을 수 있을 것처럼 크다. 가장 처음 들렸던 가게에서 네가 가지고 있던 것은 휴대폰 뿐이었으니, 그사이에 샀을 펜던트 안에는 사진이 들어있지 않겠지만.
“잘 어울릴 거야, 미사카.”
너는 익숙하게 내 성씨를 입에 담는다. 나는 한순간 입안을 달곰하게 물들였던 애정을, 꿀꺽 삼켜냈다. 영 반응이 없는 내 얼굴을 연신 살피던 네가 손끝으로 내 손에 들린 목걸이의 체인을 만지작거리며 자신 없이 묻는다.
“……마음에 안 들어?”
시선을 들어 너를 봤다. 밝게 웃던 평소의 얼굴과는 다르게 먹구름이 낀 것처럼 흐린 얼굴. 나는 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안심한 듯 밝아진 네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체인을 만지작거리는 너의 손을 잡아 목걸이를 넘겨줬다.
“채워줄까?”
너는 묻는다. 들뜬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목걸이를 올린 너의 손을 웅크려, 목걸이가 보이지 않도록 쥐게 하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
너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인다.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나는 주먹을 쥐게 한 너의 손을 네 쪽으로 쭉 밀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그것밖에는 없어서.
손끝이 바르르 떨린다.
“무슨 소리야, 미사카.”
“…미안.”
“…….”
너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닫아버린다. 나는 준비해왔던 수많은 변명거리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너는 끝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구나.’ 잡고 있던 네 손을 천천히 놓는다. 너는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펼쳐, 목걸이를 바라본다. 체인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허공에서 흔들린다. 너는 다시금 목걸이를 손에 꾹 쥔다.
“헤어지자.”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십 번을 연습했던 말은, 바짝 마른 목과 굳은 혀를 걸쳐 뻑뻑하게 입 밖으로 튀어 나간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둥, 잘 지내라는 둥의 뒷말은 목에 턱, 걸려 나오지 않는다. 숨 쉬는 법은 이내 잊힌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의 반복뿐이었다.
“미사카.”
“……응.”
너는 일어서려는 내 손을 잡고서 말한다.
“이건 너에게 주려고 산 거니까.”
너는 내가 너에게 목걸이를 쥐여주었던 것처럼, 내 손 위로 다시금 목걸이를 올리고서 쥐여준다. 그리고서 천천히 손을 밀어낸다.
“미사카가 가져갔으면 좋겠어.”
너는 웃으며 말한다.
04. 낡아 녹슬기 전에
목걸이는 하얀 형광등 아래에 금빛으로 반짝인다. 분명 아무것도 넣지 못했을 펜던트는 마치 열어달라는 것처럼, 연신 빛을 흩뿌린다. 나는 문득 목걸이를 내 손에 쥐여주던 너의 새 붉게 물들었던 목덜미나 귀 끝을 떠올렸다. 연신 내 눈치를 살피던 서글서글한 눈매나, 상기된 채로 허둥지둥하던 손짓을 떠올린다.
손끝으로 툭 건들자, 펜던트는 여전히 입을 앙다문 채로 조금 흔들린다. ‘아마 이 펜던트를 사용할 일은 없겠지만.’ 손에 쥐어진 목걸이는 어쩐지 조금 묵직하게 느껴진다. 검지와 엄지에 살짝 힘을 줘 펜던트를 눌렀다. 펜던트는 딸깍, 하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입을 벌린다.
“……읏,”
너는, 나를 사랑했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펜던트 안에서 웃고 있는 네 얼굴이 그러했고, 네 품속에 안겨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그러했다. 펜던트는 두 손에 가려져 사라진다. 꾸깃꾸깃 볼품없이 접혀있는 사진 속의 너는 웃고 있다. 우리는 웃고 있었다. 서로 마주 본 채로, 세 번째 겨울의 어느 날에서.
“…흐,…….”
네가 알련지는 모르겠지만, 내 학창시절에는 온통 네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너라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05. 우리 다시 반짝이자.
올해의 봄은 예년보다 빨리 왔다고 했던가. 익숙한 교정, 곳곳에 심어진 벚꽃잎은 보란 듯이 피어나 흔들리고 있다. 작년 이맘때 즈음 분홍빛의 벚꽃잎만 봐도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찼던 것이 무색하게, 흩날리는 벚꽃 비를 고스란히 맞는데도 머릿속을 온통 흐렸다. 드디어 5년이나 케케 묵은 이 감정에 안녕을 고할 때가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어서.
시야 너머로 흔들리는 머리카락에 벚꽃잎이 얽혀 이리저리 흔들린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면서 떼어낼까 고민하다, 천천히 손을 올렸다.
“…….”
그리고 손이 스친다.
“미안.”
손끝에 남는 뜨뜻한 온기가 선명하다. 어딘가 익숙한.
되묻는 말은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는다. 투박한 손은 잡았던 꽃잎을 머리칼에서 떼어내 허공에 놓는다. 한들한들 흔들거리며 꽃잎은 떨어진다. 손의 주인은, 마지막을 봤을 때보다 조금 핼쑥해진 소년은, 그러니까 너는 결연한 표정과는 다르게 벚꽃잎처럼 연분홍색으로 발갛게 물들 얼굴을 하고 있다.
“졸업 축하해.”
“……너.”
너는 흘끗 시선을 내려, 교복 위로 꺼내두었던 펜던트를 보며 서글서글한 눈매를 휘어트렸다. 졸업 선물이랍시고 내가 만들어 주었던 것과 똑같은 꽃다발을 내게 넘겨주며, 너는 말한다.
“나를 받아주지 않을래?”
긴장감에 속이 떨려 울상을 지을 법도 한데 기어코 웃고야 마는 너를 보며, 나는 답했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