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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미코 / 열대야_서담님]

레몬 꽃이 피었습니다

 

 

01.

  “더워…….”

  미코토는 지친 듯이 허어, 하고 숨을 내쉬다가, 모은 양손으로 바닷물을 퍼 올려 얼굴 위로 뿌렸다. 열대야 탓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뜨끈한 뺨에 고인 물이 닿으니 좀 나은 모양인지 느물느물하게 녹은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틀었다.

  레몬에서 과즙 대신 짜낸 색깔을 그대로 들이부은 것 같은 별빛의 머리칼은 맑은 바닷물 아래에서 유유자적 흔들린다. 하얀 햇볕 아래로 반짝이는 물결을 그대로 담아낸 것 같은 벽안은 가만히 물속을 응시하다가, 데구루루 굴러 미코토를 향한다. "미코쨩." 얇은 미성으로 미코토를 부른다.

  가볍게 플라스틱 손잡이를 쥔 토르가 팔에 힘을 줘 상체를 조금 들어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튜브 위로 몸을 걸친다. 동양인과는 사뭇 다른, 새하얀 피부는 등 위로 기다란 머리칼이 촘촘하게 달라붙은 탓에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코토는 튜브에 연결된 흰 밧줄을 단단히 쥔 채로 고개를 들어 튜브에 걸쳐진 토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이 깊은 곳까지 오려는 이유가 뭐야?”

  “수영을 못하니까 오고 싶은 거라구, 미코쨩.”

  미코토는 어쩐지 근질근질해진 귓가를 가볍게 긁고는 시선을 흘긴다.

  “그러다가 빠지면 어쩌려고. 당신, 맥주병이잖아.”

  “걱정해주는 거야?”

  토르는 실실 웃는 얼굴로 미코토를 내려다본다. 미코토는 그것이 괜히 얄미워 밧줄을 강하게 잡아당겨 튜브를 기울였다. “으앗, 미안해, 미안해─.”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하는 토르의 말간 얼굴에, 깊게 한숨을 푹 내쉰 미코토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 구하러 가긴 할 거지만 말이야.”

  “…정말?”

  “에? 그야,”

  하얀 햇볕 아래에 여린 속을 드러낸 다갈색의 눈동자와, 햇볕을 등진 탓에 그늘이 진 벽안이 마주친다. 말을 잇기 위해 입을 벌린 채로 순간 멈칫한 미코토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아랫입술을 핥았다.

  “내 앞에서 사람이 죽으면 찝찝하잖아.”

  “그것뿐이야?”

  어쩐지 조금 사느란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본 미코토가 끙, 하는 짧은소리와 함께 상체를 들어 튜브에 살짝 걸치며 답했다.

  “그게 당신이라면 더더욱.”

  뺨이 후끈하다. 축축하게 젖어버린 머리칼에 가려진 귀 끝도 발갛게 상기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튜브를 누르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미코토의 몸이 빠르게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미코쨩!?” 부글부글, 공기 방울이 수면 위로 피어오른다. 맑은 바닷물 아래로는 개구지게 웃고 있는 미코토의 얼굴이 일그러지게 보인다.

  “걱정했잖아, 빠진 줄 알고.”

  한쪽 팔에 두툼한 튜브를 들고서 인상을 찌푸린 토르를 시큰둥하게 보며 머리카락의 물기를 짠 미코토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빠지는 건 맥주병인 당신이 걱정해야 하는 거라고 했잖아.”

  토르가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전능신이라서 괜찮다니까.”

  “아, 그래.”

  미코토는 마찬가지로 시큰둥하게 답한다.

02.

 

  일본 특유의 습한 여름 바람이 훅 얼굴을 때리고, 으으, 하고 짧게 신음을 흘린 미코토가 질린 표정으로 토르를 바라봤다.

  “링고 아메?”

  “응. 일본의 여름 축제는, 링고 아메가 가장 상징적이잖아?”

  “어디서 뭘 들은 거야…….”

  처음으로 가는 일본의 축제가 기대되었던 모양인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미코토의 진홍색 유카타 자락을 끌어당기던 토르는 바람대로 손에 링고 아메를 들고 있다. 미코토의 유카타 색과 비슷한 링고 아메는 열대야 탓인지, 혹은 토르가 한 입 베어 문 채로 한참 우물우물거린 탓인지 조금씩 녹아 설탕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

  손이 끈적끈적할 텐데도 신경 쓰는 기색 없이, 토르는 아랫입술을 핥으며 반대 손으로 미코토의 손을 쥐었다. 더운 여름에 아까까지도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 있었던 탓인지 뜨끈한 손이 비교적 차가운 미코토의 손에 닿는다. 미코토는 시선을 내려 제 손에 참 자연스럽게 깍지를 낀 곱상한 손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토르를 바라본다.

  어둠이 내려앉은 탓에 진노랑색으로 번진 기다란 머리카락은 료칸에서 미코토가 묶어준 그대로 흔들린다. 축제의 싸구려 조명 아래로 노을빛을 닮은 속눈썹, 그 밑으로는 그늘진 탓에 남빛으로 물든 푸른 눈동자가 사르르 접힌다. 미코토는 멍청하게 그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미코토의 손을 쥔 토르가 한 차례 손을 강하게 쥐며 말한다.

  “곧 시작하려나?”

  “…에?”

  “불꽃놀이 말야.”

  들뜬 기색이 역력한 기색으로 토르가 묻는다.

  “예쁘겠지?”

  잠시 눈을 껌뻑이던 미코토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그런데 토르, 손 안 끈적거려?”

  “응? 손, 으음, 끈적거리긴 한데.”

  언제 다 먹은 건지 모를 링고 아메의 막대를 손에 달랑달랑 든 채로, 토르가 답한다. 딱 봐도 설탕물로 잔뜩 범벅이 되었을 것이 분명한 손을 빤하게 노려보다가, 짧게 한숨을 쉰 미코토가 작은 손가방에서 주섬주섬 생수와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손 내밀어.”

  남빛 눈동자가 멀거니 미코토와 생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이 선뜻 양손을 내민다. 미코토가 그 위로 생수를 붓고, 토르가 한참 시원한 물에 양손을 비비다가 슬그머니 손을 뺀다. 개운한 얼굴로 허공에 손을 털고, 미코토가 내민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펑─.

  새카맣게 물든 하늘에 색색깔의 불빛이 물들었다.

  “와…….”

  손을 닦다 말고, 큰 소리에 홱 고개를 돌린 토르가 시야 가득히 불꽃놀이를 새긴다. 얇은 입술을 헤, 벌린 채로 집중하는 얼굴. 펑, 펑, 하고 연이어서 들리는 폭죽 소리에도 하늘을 바라볼 생각조차 못 한 채, 미코토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마치 영화의 프레임처럼 시야 너머의 풍경이 머릿속에 각인될 것만 같다고. 미코토는 다시 한번 눈을 끔뻑이며 생각한다.

  “미코쨩.”

  펑─, 하는 소리는 유난히 크게 귓가를 울린다. 그리고 흐리게 번진 듯한 소리 위로, 얇은 목소리가 그려내는 글자가 덧입혀졌다. 느리게 고개를 돌린 토르가 미코토와 눈을 마주했다. 평소의 장난스런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얼굴로.

  길쭉하니 선이 예쁜 손은 천천히 뻗어진다. 맑은 벽안이 한 차례 새카만 어둠 속에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금 드러낸다. 미코토는 홀린 듯이 그 모양을 바라보다, 귓불 바로 아래에 닿은 손에 흠칫 몸을 움츠렸다.

  “가만히…….”

  미성은 마치 시의 한 구절처럼 귓가를 가득하게 채운다. 제 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실은 조금 더 큼직한 손은 부드럽게 미코토의 발간 뺨을 쥔다. 손바닥에 닿은 뺨의 열기에, 토르가 묻는다.

  “미코쨩, 얼굴이 뜨거워.”

  부끄러운 모양인지 시선을 스르르 미끄러 내려트린 미코토가 어물어물 답했다.

  “……열대야잖아.”

03.

 

  “토르?”

  “아, 미코쨩.”

  토르는 맑은 벽안을 반짝이며 반가운 듯 웃는다. 다른 여자애에게 한쪽 팔을 내어준 채로, 토르는 한 손을 들어 미코토에게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마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도르륵 피부를 타고 굴러, 이윽고 떨어진다. 그 작은 땀방울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 툭, 하는 소리는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든다. 그것이 이상해서, 미코토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옆은?”

  애써 웃는 얼굴로 미코토가 묻는다. 눈을 깜빡이던 토르는 금세 조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흘끗 제 옆의 여자애를 바라본다. 검은 피부에 새하얀 머리칼을 양 갈래로 땋은 여자아이는, 뚱한 얼굴로 토르를 바라보다 다시금 미코토를 바라본다.

  “친─,”

  “몰라도 되는 사람이야.”

  감싸는 태도가 역력하다. 미코토는 초조하게 손을 쥐었다가, 새끼손가락에 닿은 찬 기운에 금세 힘을 풀며 웃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낼 때만 해도 딱딱하고 차갑던 아이스크림은, 그 새 녹기 시작한 모양인지 차갑긴 하지만 조금 흐물텅하다. 미코토는 어쩐지 그것이 자신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미코토는 고개를 들고, 곧게 허리를 편다. 여전히 입가에 기계적으로 웃음을 매단 채로, 미코토는 물끄러미 토르를 응시했다.

  제 옆에 곤히 잠든 사이에 슬그머니 잡아 올려 입을 맞췄던 별빛을 박아넣은 듯한 머리칼, 하얀 햇살이 내리쬐던 그 날에 시원하게 찰랑거리던 바닷물을 담아낸 것 같은 눈동자. 선이 얇고 부드럽지만, 흉터로 가득했던 등이나 배. 자연스럽게도 제 손에 깍지를 껴오던 얄상한 손까지.

  천천히 시선을 내리던 미코토가, 미코토의 표정이 와르르 무너졌다. 언제 웃었냐는 듯이,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얼굴로, 미코토는 다급히 아이스크림을 든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린다. 미코토의 반응이 당황스러운 듯 금색 눈동자는 도르륵 굴러 토르를 향한다. 푸른 눈동자는 빳빳하게 굳은 채로 미코토를 향한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잔뜩 일그러진 다갈색 눈동자는 껌뻑껌뻑, 살짝 위를 향하다가, 이내 데구루루 구른다.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미코쨩?”

  “아, ……엣, 그러니까,”

  당혹스러운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미코토는 이내 완전히 시선을 내려 토르의 신발코를 바라본다. 아니, 여자애의 발끝을 바라본다. 미코토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아이스크림만 꾹 쥔다. 이제 거의 녹아버린 모양인지, 진득한 감각이 살갗에 닿는다.

  “덥, 덥네. 난 이만 가볼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얼굴뿐만 아니라 귀 끝이나 목덜미까지도 완전히. 미코토는 애써 더운 척 손부채질을 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토르는 잠시만, 이라든가 평소 주구장창 불러대던 별명조차도 부르지 않는다. 몸을 돌려 멀어지는 미코토를 잡지 않는다. 미코토는 그것이 못내 서러워서, 애써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의 뛰다시피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앞에서, 미코토는 헉헉, 하고 숨을 내뱉었다. 숨결 사이로 엉망진창으로 얽히고설킨 부끄러움도 함께 내뱉는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소리 없이 열린 엘리베이터의 안으로 들어가서, 버튼을 누른다. 평소라면 느긋하게 문이 닫히길 기다렸을 텐데, 미코토는 다급하게 닫힘 버튼을 3번 연달아 눌렀다. 울음은 턱 끝까지 차오른다.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곧 집에 도착한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꾹꾹 눌렀던 설움은 보글보글하고 금방이라도 덮어두었던 뚜껑을 들썩거릴 것처럼 끓어댄다.

  미코토는 오늘따라 느리게 열린 엘리베이터의 문을 비집고 나가, 다급하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소리 없이 문은 열렸다가, 이윽고 닫힌다. “……으흐,” 기다렸다는 듯이 울음은 잇새를 비집고 나와 흘러넘친다.

  착각했다는 수치심보다는 실패한 사랑에 대한 설움이, 절망감이, 좌절감이 먹먹한 시커먼 구름을 만들어낸다. 흐린 얼굴 가득 새붉게 물들인 열대야 위로, 먹구름에서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물든다. 분명 조금은 시원해지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얼굴은 더 시뻘게진다. 열대야는 식을 줄을 모르고, 점점 제 몸집을 불려나간다.

  빗방울은 얼굴에 이어서, 미코토가 딛고 선 바닥까지도 진회색으로 물들인다.

  잔뜩 웅크린 등은 겁을 먹은 어린아이의 것을 닮아있다. 현관에 주저앉은 채로 한참을 히끅거리던 미코토가 문득 고개를 들어, 눈물로 흐려진 시야 너머를 본다. 앞에는 미코토가 달랑달랑 사 왔던 아이스크림 바 하나가 포장도 벗겨지지 않은 채로 놓여있다. 미코토는 손을 뻗어, 손가락 끝에 걸린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살짝 잡는다.

  쏴아아, 하는 파도 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손, 꼭 잡아줘야 해?” 조금 불안한 듯이 제 손에 단단히 깍지를 끼던, 큼직하고 얄상한 손. 탓하는 말은 입안을 멤멤 맴돌다 사라진다.

 

  포장지 안의 아이스크림은 발등 위에 가라앉아있던 바닷물 마냥 무겁게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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