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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미코 / 태풍_서담님]

태풍이 되어      

 

 

 

 

 

 

 

 

 

01.

  창밖으로는 주륵주륵, 선명하게도 빗줄기가 그어진다. 휴대용으로 샀던 터라 그리 크지 않은 노트북의 화면은 힘겹게 들여다보면서 하나하나 천천히 타자를 치던 쿠로코가,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린 채로 멀거니 눈을 끔뻑였다. ‘이런 비가 앞으로 이틀은 더 내린다고 했던가요.’ 쿠로코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서늘한 공기에 드러난 팔을 쓸어내리며 가볍게 턱을 괸다. ‘하긴, 내일 태풍이 온다고 했으니까요.’

  “언니, 설마 그러시진 않으시겠지만, 내일 태풍이 온다고 했으니…….”

  유난히도 비가 오는 날을 싫어하는 미코토는 이미 에어컨을 추울 정도로 틀어놓고, 두툼한 이불을 끌어안고서 잠에 든지 오래다. 일렉트로 마스터라서 그런 건지, 혹은 그저 그런 성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습한 것도 더운 것도 치를 떨 만큼 싫어하는 탓에 실내 온도는 굳이 온도계를 가져와 재어보지 않더라도 18도는 거뜬히 유지하고 있을 터였다. 덕분에 한겨울 즈음이 되면 꺼낼 생각으로 사두었던 두툼한 실내 카디건에 팔을 꿴 쿠로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추우면 감기에 걸린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그럴 때마다 에어컨 가지고 감기 같은 거 안 걸린다고 큰소리를 떵떵 치며 대답하는 미코토를 떠올린 쿠로코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도 물론 더위를 잘 타는 편이라 이런 환경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에어컨 온도에 손을 대는 순간 귀신같이 일어난 미코토가 비몽사몽한 눈초리로 방안을 한 차례 둘러보며 다시 온도를 내려놓을 것이 분명했다.

  우르릉─.

  태풍이 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처럼, 빛이 번쩍이고 거의 동시에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공기를 흔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모양인지 으응, 하고 꿈질거리던 미코토가 슬금슬금 눈을 떴다.

  “쿠─로코.”

  “네에, 네, 언니. 벌써 정오가 넘었으니, 쿠로코는 그만 일어나주셨으면 하는데 말이에요.”

  머릿속에 익숙하게 떠오른 복잡한 식의 결괏값을 간단히 도출해내며, 쿠로코는 창문 근처에서 곧바로 침대 옆으로 이동한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조금 놀랄 법도 한 희귀한 능력에도, 미코토는 익숙한 것처럼 손을 뻗어 제 눈앞에서 흔들리는 쿠로코의 손을 살짝 쥐고 약하게 끌어당긴다.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게 빤히 보이는 행동에 슬쩍 몸을 떤 쿠로코가 기꺼이 허리를 숙이며 생각했다. ‘언니께서 졸업하시면, 이런 귀여운 모습을 다른 사람도 보게 되는 걸까요?’ 으음. ‘언니의 파트너는 이 쿠로코, 한 명으로 충분한데 말이어요.’ 쿠로코가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미코토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댄다.

  “……언니?”

  하지만 그럼에도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다. 느리게 눈을 끔뻑이며 바르게 허리를 편 쿠로코가 여전히 약한 힘으로 제 손을 잡고 있는 미코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기도 한데, 허리를 숙이는 것조차도 기다리지 못한 채로 다시 곯아떨어진 미코토의 손은 이내 힘을 잃고 툭 떨어진다.

  “언니도 참.”

  쿠로코는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손을 가만히 침대 위로 올리며, 그 옆에 무릎을 모아 쭈그려 앉았다.

  실내 온도가 18도 혹은 그보다 낮을지도 모르는 데도, 미코토는 추운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퍽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무슨 꿈을 꾸는지, 발갛게 물든 뺨을 우물우물거리던 미코토가 폭신한 베개에 뺨을 문지른다.

  “……언니.”

  쿠로코는 나지막이 미코토를 부른다. 깊게 잠든 미코토가 그 소리를 들을 리가 없음을 아주 잘 알고 있음에도, 쿠로코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언니(お姉様), 하고 익숙한 호칭을 입에 담았다.

  ‘언니께서는 언제쯤이야, 이 쿠로코를 봐주실 텐가요?’

02.

  미사카 미코토는 비를 싫어한다. 장마를 싫어했고, 태풍을 싫어했고, 높은 습도로 살갗이 끈적끈적해지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했다. 중학교 2학년, 혹은 중학교 3학년의 봄까지만 해도 여름에 대한 망상으로 가득 차서는 쨍쨍 내리쬐는 햇볕, 그 자체를 사랑했던 것과는 퍽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좋아해.”

  미코토는 사랑했던 그 여름이 조각조각 깨어지던 그 순간을, 지금까지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리쬐던 햇볕, 나뭇잎 사이사이를 비춰내 구멍이 뚫린 것처럼 드문드문 하얗게 물들던 풍경. 맴맴, 하고 매미가 정신없이 울어대고, 길거리에는 더운 날씨 탓인지 좀처럼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보이는 사람들은 저마다 살갗을 드러낸 채로, 시원한 물을 받아 파릇파릇하게 생기가 잔뜩 오른 풀잎처럼 말간 얼굴이다. 미코토는 그 풍경을 사랑했다.

  첫사랑을 만났던 계절, 수많은 자매를 만났던 계절. 절망했지만, 그와 동시에 환희했던 계절. 미사카 미코토에게 있어서 여름은 수없이 많은 색채의 물감을 이리저리 뒤섞어 놓은, 그럼에도 저마다의 색깔을 잃지 않고 반짝이며 드러내고 있는 계절이었다. 수많은 감정과 감정이 교차하고, 애정하는 자매들의 얼굴이 덧씌워지고, 그 사이에는 처음으로 피어난 사랑이 몽글몽글 솟아 그 위를 도톰한 이불처럼 덮고 있다.

  미사카 미코토는 처음으로 겪었던 변화를, 솟아오르던 애정을, 어쩔 줄 몰라선 붉어지던 제 뺨을, 떨리던 가슴을, 그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만큼 미코토는 강렬한 감정이 향하는 사람을 귀애했던 거였다.

  “……미안.”

  삐죽 머리 소년은 곤란하다는 듯한 얼굴로 슬금 고개를 숙인다. 그 무엇보다 여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짙푸른 눈동자는 필터를 뺀 것처럼 새파랗게 물든다. 나뭇잎 사이를 빠져나온 하얀 햇살이 소년의 눈동자 위를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아.” 미사카 미코토는.

  “아냐, 아냐. 내 감정일 뿐인걸.”

  그 모든 것을 사랑했고, 동시에 싫어할 수밖에는 없었다.

  뭉글뭉글 솟아오르던 애정의 파도는 연한 분홍빛에서 새파랗게 변한다. 마치 소년의 눈동자처럼 새파랗게 변해서는.

  “신경 쓰지 마.”

  “미사카.”

  “─그래도 친구, 지?”

  미코토는 홱 몸을 틀어, 소년을 등지며 묻는다.

  새파랗게 변한 파도는 쏴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닷가에 서 있던 미코토의 다리를 적신다. 기껏해야 무릎 즈음에서 찰랑거리던 연분홍색 파도는, 어째서인지 금세 수위를 높여 허리께에서 출렁인다. 햇볕에 달구어진 탓인지 딱 좋게 따스하던 물결은 그 색만큼이나 차갑게 변한 지 오래였다.

  미사카 미코토는 한순간 그 모든 것들을 원망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래.”

  “응, 그거면 됐어.”

  울컥 눈물은 차오른다.

 

 

 

 

  “─언니?”

  “…….”

  미사카 미코토는 비를 싫어했다. 오랫동안 앓아왔던 마음을 내뱉었던 날, 돌아가는 길에 소나기가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쏴아아, 쏴아아, 하고 쏟아지는 소리에 미코토가 내뱉었던 소낙비 울음이 씻겨져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아니.

  “울지 마시어요, 언니.”

  미코토는 생각한다. ‘너 외에는 아무도 눈치채주질 않아서.’ 쿠로코는 적갈색의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로, 당혹스러운 듯 우왕좌왕하다가 미코토를 향해 몇 발자국 다가선다. 쿠로코는 들고 있던 하나뿐인 우산을 천천히 미코토 쪽으로 기울인다. 이미 빗물에 다 젖어버렸는데도,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쿠로코, 젖고 있잖아.”

  “쿠로코는 괜찮답니다. 쿠로코보다는 언니가 한참 더 많이 젖으셨는걸요.”

  “난,”

쿠로코는 선하게 웃는 얼굴로 미코토의 손을 쥔다. 기울어진 우산에 제 어깨가 젖고 있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서, 쿠로코는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미코토는 천천히 눈을 끔뻑인다.

  “돌아갈까요?”

  미코토는 고개를 수그려, 제가 두 손 가득하게 쥐고 있는 줄 알았던 새파란 애정을 봤다.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들어 쿠로코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시라이 쿠로코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미코토는 문득,

  “응.”

  어린 후배의 눈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연분홍빛의 파도가 넘실거린다는 걸 깨닫는다.

 

 

 

 

 

03.

  “좋아해요, 좋아해요…….”

  미코토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제 어린 후배는 언젠가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넘실대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눈물로 가득 젖은 손끝이 슬그머니 미코토의 손끝을 스치고, 미코토는 잠꼬대인 척 쿠로코의 손을 쥔다. 놀란 모양인지 순간 울음소리가 멎는다.

  “미코토.”

  시라이 쿠로코는 쏴아아, 쏴아아, 하고 요동치는 바다 한복판에 몸을 맡기고서 그대로 흔들린다. 항상 중심을 잡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발목에 족쇄라도 매단 것처럼 쿠로코는 그저, 그저 점점 꼬르륵 잠길 뿐이었다. 쿠로코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제 마음을 쥔 이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미코토, 언니.”

  하고.

  미사카 미코토는 비를 싫어했다. 그것이 힘껏 내뱉었던 울음소리를 그대로 녹여,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미사카 미코토는 태풍을 싫어했다. 그리고 바다 또한 싫어했다. 넘실거리던 감정의 파도, 하릴없이 휩쓸리다가 결국엔 공기 방울이 된 마지막 숨결을 한 번 내뱉고서 심해로 끌려가던 감각이 아직까지도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했던 감정, 끝내 그것은 부글부글 끓다가 끝내엔 태풍이 되어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놓는다.

자연현상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는 인간은, 감정 앞에서도 그저 휩쓸리고 순응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언, 언니?”

  미코토는 손을 뻗어 동그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화들짝 놀라선 우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침대에 얼굴을 묻은 쿠로코가 우물우물 묻는다.

  “언제부터 깨어있으셨어요?”

  미코토는 여전하게도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답했다.

  “고마워.”

  쿠로코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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