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키액셀 / 영화_엘테라님]
[미원통행] 영화
─젠장. 어떻게 된 거야? 저런 게 있다고는 안 했었잖아.
그가 옆에서 같이 숨을 죽이고 있는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겁에 잔뜩 질려있었다. 밖에서 자신들을 찾는 이 세상 것이 아닌 존재는 문 옆에 바짝 붙어 문밖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 이쪽에 있단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는 자신을 탓하는 그를 노려보며 속삭였다.
─정말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게다가 오자고 했던 건 너였어.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너였고.
상황은 심각했다. 빨리 이곳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저것에 살해당할지 모른다. 둘이 숨을 죽이고 있는 곳은 흔한 창문 하나 달리지 않은 창고 방이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저것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던가, 운을 믿고 강행돌파 하거나. 이 미친 상황을 단 일 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그것에 눈길을 주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가자.
─미쳤어? 죽으려면 혼자 죽어.
자신은 이곳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그녀가 한 번 결심하면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밖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을 찾는 그것을 살피며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세상을 찢을 듯한 우렁찬 소리와 함께 시야를 앗아갈 정도로 밝은 빛이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이때를 노려 문밖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는 그것이 있는 거실을 지나쳐 복도 끝에 있는 현관에 다다른 듯 보였으나, 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문 옆에서 거울을 통해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거울에 그것의 모습이 비쳤다. 안돼. 그녀는 자칫하면 입 밖으로 소리를 낼 것 같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더는 볼 수 없다. 그녀는 거울을 거두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그의 단말마가 들려오고.
─앞으로 3명.
그녀의 옆에서 그것이 웃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 가득 여성의 높은 비명이 울렸다. 화면을 바라보던 액셀러레이터는 큰 소리에 흠칫 놀라며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의 악력이었지만 급작스러운 힘에 놀랐는지 카키네가 그를 바라보았다.
“아프다고.” 불평을 토로하듯 말하자 액셀러레이터는 그제야 힘을 준 걸 깨닫고 손에 힘을 풀며 “그럼 이 손 놓던가.” 카키네를 보지도 않고 전했다. 액셀러레이터의 시선은 TV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카키네는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건 안돼.”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TV를 바라보았다.
TV에선 개봉한 지 두 달이 넘은 철 지난 호러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런 장르가 취향은 아니었지만, 여름에는 호러 영화라면서 영화 DVD를 발려온 카키네 탓에 야심한 밤에 영화를 보게 되었다.
현실이 판타지 호러나 다름없으면서 깜짝 놀라는 요소에 면역이 없는 모양인지 액셀러레이터는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카키네 쪽으로 붙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덩치를 가진 그것이 그녀를 붙잡으며 손을 뻗고 있었고, 얼굴은 지극히 무표정한 채로 액셀러레이터는 다시 카키네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카키네는 영화 시작 이후 열 번은 더 겪은 상황에 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이 나쁜 거다…’
분명 영화 시작 전에 “무서우면 손잡아도 돼.”하며 액셀러레이터를 놀렸던 건 카키네였다.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뇌를 직접 보고 싶은 거냐고 짜증 내며 그가 내밀었던 손을 매몰차게 쳐냈던 건 액셀러레이터였다. 그런데 영화가 슬슬 공포에 젖어 들어가는 틈을 타 소파 위에 올려져 있던 희고 작은 손을 슬쩍 쥐었던 건 카키네였다. 그 뒤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손을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몇 번이고 세게 쥐어졌다.
창밖은 거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화에 맞는 음험한 분위기로 가득한 방안, 액셀러레이터는 카키네에게 붙어 영화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의 온도가 맞닿은 어깨를 통해 전해지자 카키네는 몸을 크게 움츠렸지만, 액셀러레이터는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카키네는 어쩔 수 없이
“…액셀러레이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시끄러워.”
이건 글렀다. 완전히 영화에 빠져들었다. 저런 B급 영화가 뭐가 좋다고 물론 보자고 했던 건 자신이지만 말이다.
신체접촉이 처음인 건 아니었다. 사귄 지 햇수로 1년이 넘어갔으니 보통 연인이 할 법한 행동은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건 지금 접촉을 해오는 주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액셀러레이터라는 것. 카키네와 액셀러레이터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체접촉은 대부분 카키네가 먼저 시작했다. 손을 잡거나 껴안거나, 기타 등등. 주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은 액셀러레이터 탓에 백이면 백 카키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었었다.
자연스럽게 액셀러레이터에게 붙기 위해 (사귀고 있다고 자각하면서도 닿으면 기겁을 하기 때문에) 영화를 권유했던 건 카키네였다. 그랬는데, 그랬었는데 말이지. 카키네는 예상치 못한 복병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먼저 다가와 줄지 예상치 못했다. 여주인공이 비명을 지르든, 팔이 하나 날아가든. 카키네의 머릿속에서 영화는 이미 뒷전이었다. 제 손을 잡고 놓을 줄 모르는 저 하얗고 작은 손과 제 어깨를 간질이는 새하얀 머리칼, 후각을 자극하는 그의 체향. 카키네는 그와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누가 이 녀석에게 눈치라는 걸 좀 키워줘 봐.’
카키네는 속으로 어느 때보다 빠르게 소수를 세기 시작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두 시간 정도를 같은 자세로 앉아 있던 탓에 찌뿌둥한 몸을 펴고 하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카키네가 권유한 것치고는 영화는 나쁘지 않았다. 영화도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텐데, 창밖을 바라보니 장마철이 으레 그렇듯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저 정도면 우산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집에 가는 건 글렀군.’ 어쩔 수 없이 자고 가야 했다. 액셀러레이터는 오늘은 이곳에서 잔다고 그에게 통보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카키네를 바라보았다.
“어이, 카키네. 오늘은… 너 뭐하냐.”
“929, 937… 어?” 카키네는 그제야 영화가 끝난 걸 알아챘는지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액셀러레이터를 바라보았다.
“왜 소수는 세고 있는 건데.”
“영화가 너무 지루하길래.”
당황했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니 액셀러레이터가 얼굴을 구기고 혀를 찼다.
“그래서 왜 불렀어?”
“오늘 자고 간다고.”
하필이면 오늘. 웃고 있는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오늘?” 카키네가 되물으니
“감기 걸리면 네가 책임질 거냐?”
“간호해줄 순 있는데.”
“그냥 죽어.”
카키네는 “알았어, 알았어.” 하며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당겨 그를 자기 품에 넣었다. “야!” 가벼운 몸으로 손쉽게 끌려간 액셀러레이터가 카키네에게 이거 놓으라며 불평을 토로했지만 카키네는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새하얀 정수리였지만, 품에 안긴 액셀러레이터는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카키네를 노려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던 액셀러레이터는 근력과 체격에서 밀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기기로 했다. 드디어 얌전해진 액셀러레이터를 품에 안고 카키네는 그대로 소파에 누워버렸다. 제 팔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고 제 위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카키네가 말했다.
“너무 귀엽지 마라.”
“드디어 미쳤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작은 동물을 어쩌나. 카키네는 썩은 표정을 한 액셀러레이터에게 쪽, 짧게 입맞춤해주고 피식 웃어 보였다.
“다른 영화도 볼까.”
“내일.”
씻으러 갈 테니 이거 놓으라는 말에 순순히 팔을 풀어주고 욕실로 들어가는 액셀러레이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싫다고는 하지 않는 게 액셀러레이터의 애정표현이었다. 귀여워 죽겠다니까. 카키네는 시선을 검은색 화면에 두고 생각했다.
‘내일은 무슨 영화 볼까.’
역시 호러 영화가 좋겠지? 카키네는 그리 생각하며 TV를 껐다.